일상 이야기

[스크랩] 지 하는 날

초의거사 2013. 3. 21. 12:12

  하는 날

(나 어릴적 우리 고향에서는 어른들 쌀계(契) 하는 날을 그냥 하는 날 이라 불렀었다)

그 옛날 가족 경제의 100%를 1차 농업에 의존하고 살던 시절 해마다 이맘때 쯤이면

농촌 고향은 그야 말로 할일이 없었다.

새끼꼬는 일 가마니 치는 일 아니면 여자들이 하는 길쌈 정도가 할일의 전부라 할만큼

한가한 일상이었다

투전으로 누가 얼마를 잃었다느니 하는 반갑지 않은 소란들이 여기 저기에서 들려오는 것도

이때쯤 부터 이었다.

 

내가 7~9세쯤의 기억속의 한 단면 

한가한 일상에서 좀 특별한 행사(순전히 내 기준으로)가 열리는 것도 이때쯤 부터이다.

우리 집에서는 한번도 치룬 기억이 없는 다른 집에서만 하는 특별한 행사다.

우리 엄니는 이 행사로 인해 이집 저집 부엌일을 도우러 다니셨다.

이른바 하는 날이다.

 

여러 집 하는 날 중 ㅇㅇ 할아버지 댁 하는 날은 웬만한 잔치보다 더 호사 스러웠다.

아침 나절부터 머슴 살이 하시는 아저씨들의 떡 메 치는 소리가 담을 넘었고 우리 엄니 뿐

아니라 마을의 아주머니들이 거의 일손을 도우러 가셨다.

 마당에 들어 가 보면 아주머니들이 이미 쳐놓은 하얀 떡뭉치를 널판위에 쭉쭉 펴놓고

고소한 콩가루, 까만 깨가루를 입히고 네모진 모양으로 손질하며 칼질을 하고 계시다. 인절미다.

 옆에서 구경하다 운이 좋으면 모양이 좋지 않은 꼬투리를 얻어 먹을 수 있다.

아직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는 쫄깃쫄깃한 그 인절미 꼬투리 맛이란 지금 생각해도

침이 고일 정도로 기가 막혔다.

마루 한쪽에서는 무슨 도장을 찍듯 문양이 찍힌 떡이 만들어 지고 거기에 고소한

참기름을 발라 채반위에 가즈런히 쳐 놓으신다.

막걸리가 나무통채로 배달되어 마루아래 놓이고 주전자 대여섯개가 준비 하고 있다.

부엌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부엌문 위로 피어오르고 김 따라 나오는 고깃국 냄새

그리고 무언지 모를 맛있는 반찬 냄새들 ---

 

그 시간 쯤이면 할아버지 아저씨들이 방을 채우기 시작한다.

동네 분들도 계시고 타 동네에서 오시는 얼굴 모르는 분들도 계셨다.

어느분은 머슴 앞세워 쌀을 지고 오시기도 하고 어느분은 직접 쌀가마니를 지고 오시기도 하고

어느분은 그냥 오시기도 하고 --

온 집안이 왁자지껄 잔치집이 따로 없다.

방에 모여 앉으신 어른들은 무슨 회의 같은 걸 하시며 어떤 때는 의견 충돌이 있는 듯

큰소리도 나곤 했었다.

말리는 소리, 나무라는 소리, 한참 소란 스럽다가 조용해지면

밥상을 들이라는 ㅇㅇ 할아버지의 명령이 떨어진다.

이때부터 머슴 아저씨들은 음식 상 나르기, 술 나르기에 바쁘시고

상위에는 상상 속에서나 있을 법한 진수 성찬이 가득 하다.

 

점심 식사가 어느 정도 끝나가고 부엌에서 일 하시던 아주머니들이 조금 한가해 지면

마당에서 목을 길게 늘이고 기다리던 우리들 에게도 조그만 은총이 내려온다.

1차 방에서 나온 상에서 남은 음식들을 대충 챙겨 마당 한구석에 만들어진 자리에

상을 차려 주면 우리는 만족한 성찬을 즐겼다.

완전한 모양의 인절미, 고소한 참기름이 발라져 있는 도장찍힌 떡, 고깃국, 바삭바삭한 구운김,

이름모를 생선조각, 돼지고기, 닭고기 조각, 콩가루,깨가루가 조금 묻어있기는 했지만

귀한 사과조각도 있었다.

마당에는 이미 짚이 푹신하게 깔려있어 오래 앉아 성찬을 즐기어도 발도 시리지 않고 

마냥 좋기만 했다.

 

오후에는 술이 거나해지신 어른들이 가끔 풍장을 치며 놀기도 하셨다.

마당에서 장독대로 또 부엌으로 대문간으로 무슨 주문 같은 걸 외며 돌다 마지막으로 

마당 한 가운데에 술상을 차려 놓고 질펀지게 놓시었다.

 

가 끝나고 저녁 나절에 오시는 엄니의 손에는 항상 음식 보따리가 들려 있었고

나는 그것을 기다리며 즐거워 했다.

속으로 우리 집은 왜 를 하지 않는지 궁금했지만 나는 끝내 엄니 한테 물어보지는 안했다.

그렇게 시작된 는 옆 집에도 위 집에도 고개넘어 집에도 시차를 두고 열렸다.

우리 엄니는 그런 집을 돌며 부엌 일을 도우러 다니셨고

나는 저녁 나절 엄니의 음식 보따리를 목 길게 늘이고 기다렸다.

그리고 나는 맨날 동네에 하는 날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 했다.

(딱 그 때만 -- 나중 그 의미를 알고 부터는 엄니 한테 음식 얻어오지 말라고

투정을 부렸던 기억도 있다)

 

무심한 세월은 이제 그때 하시던 어른들 만큼 나를 늙게 했고

그 때의 그 인절미 맛은 이제 어디에도 찾아 볼수 없다.

그 시절 세상에서 제일 좋았던 우리 엄니 형용도 가물 가물 해지고

그 시절 세상에서 제일 정겹던 고향 풍경도 가물 가물 해진다.

 

1월 16일 고향 향우님들과의 신년 인사회가 기다려 진다.

 

 

첨부파일 백년설-고향설.wma

 

 

 

 

 

 

출처 : 왕솔나무
글쓴이 : 초막거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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