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1960년대 성북국교 가을 운동회
오늘은 까마득한 옛날 1960년대 우리동네 가을 운동회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워낙 오래된 일이라 순전히 내 기억속에 있는 내 눈에 비친 나의 이야기일 수 있다
내가 국민학생 시절 1960년대 성북국교 가을 운동회는 단순히 어린 학생들만의 운동회가 아니었다 지토리 전체 주민의 축제였고 잔치였다. 5~6학년 시절, 나는 당일 아침 일찍부터 들뜬 마음으로 운동복으로 갈아 입고 코스모스 한들거리는 들길을 따라 학교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행진곡에 발마추며 다른 아이들 보다 일찍 학교에 도착 했다 전날 선생님으로 부터 일찍 와서 운동장 정리 하는데 일을 거들으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운동복이래봐야 흰 런닝에 검정색 팬츠 그리고 청색 혹은 백색 모자가 전부- 그래도 학교에서 일정한 비용을 받고 지급하던 런닝에는 왼쪽 가슴에 청색 글씨로 <성북>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지만 장에서 그냥 파는 런닝보다 비싸서 우리엄니는 임천장에 가서 그냥 흰 런닝을 사다 주셨다.
나는 가슴에 <성북>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그 런닝을 산 애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어리고 부러운 마음에 난 큰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나는 흰 런닝을 펴놓고 파란색 잉크로 글씨를 썼다가 잉크가 온통 번지는 바람에 런닝을 버렸다. 결국은 엄니한테 뒈지게 혼나고 입었던 헌 런닝을 입고 운동회에 나갈 처지에 놓였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누구에게 전수를 받았는지 스스로 깨우쳤는지 기억은 없지만 잉크에 풀을 섞어 놓고 종이에 글씨를 파서 런닝에 대고 솜으로 잉크를 묻혀 살살 찍는 방식으로 런닝에 잉크가 번지지 않도록 멋지게 글씨를 새겨 넣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몇몇 애들에게도 글씨를 새겨 줬던 기억이 있는 것 같다.
글씨가 새겨진 운동복을 입고 의기 양양 하게 들어선 운동장 하늘 에는 만국기가 휘날리고 스피커에선 갖가지 동요가 맑은 가을 하늘에 울려 퍼진다. 가운데에 본부석이 차려져 있고 양 옆으로 천막들이 쳐져 있다 우리는 선생님 지시에 따라 탁자며 의자들을 교실에서 날라 그 천막아래 나란히 놓고 한편으로는 석회분으로 타원형의 운동장 트랙을 말끔히 그렸다. 나는 늘 궁금했다. 그 그늘진 천막아래 의자에 편히 앉아 구경하는 사람들은 누구들 인지--- 우리 엄니 같은 사람은 한번도 그 곳에 앉아볼 염두조차 못내는 것 같아보였다.
운동회 시간이 다가오면 갖가지 장사꾼들이 먼저 자리를 잡는다. 장난감, 군것질, 과일, 떡, 막걸리, 국밥,-- 온갖 장사들이 다 몰려 오는 것 같다. 때를 같이 하여 각 부락 선발대 들이 지정된 자리에 짐을 풀기 시작 한다. 태동, 백티, 상하룡, 등애사창, 지장, 5개 부락이 자리를 잡고 일전(?)을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다. 미리 언급 했듯이 당시 가을 운동회는 지역 축제였다. 지토리 온 주민이 참여 하여 넓은 운동장에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렸다 당시 어린이 운동회라는 것이 판에 박힌 듯한 순서에 따라 행해지는 -- 그래서 지금의 어린이 운동회에 가봐도 대동 소이한 그런 행사였다 청군, 백군으로 나뉘어- 달리기, 기마전, 오자미 던지기, 손님모시기, 장애물 달리기, 덤부링, 개인 달리기, 등 다만 지금과 다른 것은 어린이들이 자유로운 개인 행동을 제약 받고 일정한 구획된 장소에 모여 앉아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하고 응원 대장의 통솔하에 일사불난하게 움직여야 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있어야 비로소 자유로운 행동이 용이했다.
점심시간은 마치 커다란 음식 축제장이다. 각 가정에서 특별히 정성으로 준비해온 도시락들이 펼쳐지고 아이들은 마냥 신이 났다. 국밥집 아주머니들은 그 시간에는 손님 맞느라 눈코 뜰새 없이 바쁘고 아저씨들은 그 국밥집 간이 의자에 앉아 막걸리 주문에 바쁘고 엄니들은 준비해온 도시락으로 애들 챙기기에 바쁘다. 나는 매년 열리는 운동회때 마다 한두번을 제외 하고는 우리 엄니가 오지않아 집으로 달려가 밥을 먹고 시간에 맞추어 학교로 달려왔던 슬픈 추억(?)이 있다. 점심시간 어른들의 대화 내용은 거의 오후 부터 있을 각 부락 청년들의 부락 대항 이야기다. 바깥 세상 소식에 어두웠던 시절 운동회때의 부락대항은 시골 마을에서 지금의 올림픽(?) 만큼이나 큰 관심사였다.
그 곳에서 우리 동네 선수들은 단연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해마다 종합 우승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리 동네 선수들은 자만하지 않고 거의 보름(?)전 부터 연습을 했던 것 같다. 그 당시 갈수기에는 통뫼 내깔(내)과 큰 내깔에 전국의 어느 유명 해수욕장 보다 고운 모래가 깔려있었고 유리조각이나 쇠조각 들이 없던 시절이라 맘놓고 연습을 할 수있었다. 당시 지토리 아니 장암면 최고의 인기 선수는 단연 돋보이는 정상태 님이었다. 단거리에서 부터 중,장거리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남,여 혼성 계주에서의 활약상을 보면 앞의 주자들이 타동네 선수들에게 상당한 거리 뒤져 들어와도 정상태 님에게 바톤이 인계되는 순간 이미 순위는 정해져 있었다. 후 순위로 달리는 선수들을 보며 애태우다 마지막 1등으로 역전, 결승점을 통과하는 순간 동네 사람들은 한마음이 되어 함성을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다. 중,장거리에서도 마지막 한두바뀌 남을때까지 꼴찌 주위에서 맴도시다가 마지막 스퍼트에서 역전극을 연출 하시곤했다. 작은 올림픽에서 보는 감동적인 드라마였다. 그 뒤로도 님은 오래도록 고향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으며 달리셨고 지금도 고향을 지키며 고향의 발전과 단합을 위해 애쓰고 계신다.
그 때 나는 누가 장래 희망이 무어냐고 물었다면 부락대항 달리기 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것 같다. 내눈에 비친 당시 선수 들은 많은 사람들로 부터 무한한 칭찬을 받고 닭 백숙에 박카스를 마음대로 마시고 귀하고 귀하던 능금을 나무 박스에서 아무렇지 않게 꺼내먹고 하던 모습이 정말 부러웠다. 그러나 당시 나의 현실로는 이루지 못할 불가능한 꿈이었다. 6명이 조를 짜서 달리던 학생 달리기에서 나는 항상 4등 밖에 못했다. 나는 국민학교 시절 운동회 내내 "賞" 이라고 도장 찍힌 공책을 한번도 받아보지 못했다.
운동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온동네 사람들이 환희의 기쁨을 감추지 아니한다. 어떤때는 선수들을 꽃 목걸이를 해서 목마 태우고 올때도 있고 어떤때는 소구루마에 태우고 오기도 했다. 풍물소리에 맞추어 <우승기>와 <농자천하지대본> 기를 흔들며 온동네를 휩쓸고 지나간다. 가징개를 거쳐 초막골을 지나 덤뫼로 넘어 간다. 나는 항상 덤뫼로 넘어 가는 행렬을 따라가지는 못했다. 그래서 행렬이 어디에서 어떻게 멈추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이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고향 옛 풍경 즐거웠던, 기뻤던, 그리고 괴롭고 슬펐던 기억까지도 마음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한없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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