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60년대 나의 추석
추석 전날 아침부터 엄니와 뉘님은 도고통에 쌀을 넣고 빻고 빻고 가는체로 치고 치고 뽀얀 쌀가루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 송편을 만들 쌀가루를 만드는 지루하고 고된 작업이다
그 쌀은 또 며칠 전부터 손바닥 만한 위샘골 논에서 아직 익지 않은 풋 벼를 베어다가 홀테로 훌고 가마솥에 쪄서 멍석에 펴 말리고 또 도고통에 넣고 절구로 찧어서 도정을 한 찐 쌀이다
그 찐쌀은 당시의 어린 우리들에겐 커다란 간식거리 였다 몰래 한움큼씩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먹었는데 들키기라도 하면 여지없이 혼나기도 하였다 언젠가 수덕사에 관광 갔다가 주차장 난장에서 찐쌀을 팔기에 한되박이나 사다가 씹어 봤으나 옛맛은 아련한 추억속에나 있었고 -------
엄니의 심름으로 바구니 들고 솔잎따러 뒷산에 오른다 솔잎의 뒤에 붙어있는 껍질이 붙지 않게 따는 요령을 일찍 터득한 나는 다른애들보다 일찍 많은 솔잎을 땄다
넉넉진 않지만 집에는 지난 설날 이후 처음으로 기름냄새가 풍기고 우리는 마냥 신이 나서 송편을 만든다 엄니와 뉘님은 부억에서 송편을 찌고 쪄내온 송편 중 배가 터진 송편을 서로 찾아 먹느라 한차례 전쟁을 치룬다 온전한 송편은 차례를 지낸 후 먹어야 한다는 묵시의 규율이 몸에 배어 있었다 나는 지금도 차례전 맛보라며 온전한 송편을 내오면 옛 생각에 쓴 웃음이 나온다
아부지는 성치 않은 몸으로 마루끝에 앉아 콜록대며 밤을 치시며 연신 문밖을 살피시고 엄니는 물길러 가는체 하며 우물은 쳐다보지 않고 자꾸 동구 밖을 살피신다 객지에 나가있는 형들을 기다리신다는걸 나는안다
추석날은 아침부터 바쁘다 세수대야에 낑깅대며 물을 길어 마당에 뿌리고 내 키와 같은 대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방에서는 아부지가 차례상 차리시느라 바쁘다 올해는 객지의 형들이 안온다 모두의 기다림은 커다란 실망으로 다가와 누구도 그에대한 말없이 묵묵히 차례를 지낸다
객지의 형들이 안오면 그해 명절은 너무나 쓸쓸하고 속상하다 아부지도 엄니도 별로 웃음이 없으시고 물론 우리 추석빔도 없다
아침먹고 나면 아부지를 따라 성묘를 다녀야 한다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산소에 성묘를 하다보면 우리는 왜이리 많은 산소에 성묘를 할까 무척 궁금 했지만 나는 끝내 아부지께 여쭈어 보질 못했다
성묘를 끝내고 동네 아이들이 모이는 ㅇㅇ네 반마당에 갔다 그곳에서 재잘대며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나는 숨듯이 몸을 낮추어 집으로 돌아왔다 모두들 목카라가 빳빳한 그대로인 새옷과 새 운동화를 신고 뛰고 달리고 노는데 나는 무릅과 팔꿈치를 색갈 다른 천으로 기운 옷에 때운곳이 다시 떨어져 너덜거리는 기차표 검정 고무신 ---
나는 집에 돌아와 그렇잖아도 검게 타있을 엄니 가슴을 파헤치고 있었다 "나도 옷 사달라고" "나도 운동화 사달라고" 울다 울다 지쳐 두통을 호소하면 엄니는 "울면 더 아픙게 울지말어" 하시며 떨어진 옷고름으로 내머리를 묶어 주셨다
2007년 추석은 ---??? 사시사철 좋은 옷으로 감싸고 사니 추석빔이 따로 있을리 없고 떨어지기는 커녕 멀쩡한 옷도 마음에 안든다고 몇번 입고 버리고 운동화 한켤레가 십여만원----- 신발장에 가득한 신발 골라 신고 다니고 새끼끈으로 고무신 동여매고 오르던 성묘길은 인천공항을 통해 하늘로 오르고 차례상에 올랐던 송편은 냉장고에서 석달 열흘 뒹굴다 행방이 묘연해지고 나머지 차례음식의 운명도 대동 소이 하니 그 옛날 배고팠던 추억을 가슴에 안고 사는 그음식들 억척 스레 처리하느라 늘어나느니 뱃살이요 늘어나느니 뱃살 뺄 걱정이라
모두들 풍성한 추석을 구가 하고 있는 이때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수해민 들과 아직도 이땅에 살면서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고 명절을 맞는 많은 소외된 사람들과 마음으로나마 같이 하고져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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